
우리술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고 있다. 좀 더 솔직하게는 늘고 있기를 바란다. 위스키, 와인, 맥주 등 수입주류에 익숙한 우리에게 우리술은 여전히 어렵고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안타깝진 않다. 우리술이 정말 고급스럽고 맛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서도 안 마시는 게 아닌, 몰라서 못 마시는 이유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술을 제대로 알리면 이를 찾을 사람은 넘치고 넘칠 테다.
술이라는 단어는 오래 전 ‘수불’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火)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물과 곡식, 누룩이 섞여 끓어오르는 현상을 보고, ‘난데없이 물에서 불이 난다’는 생각에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 수불이 ‘수~블>수~울>수~을’의 과정을 거쳐 술로 변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술의 한자적 기원을 살펴보자. ‘주(酒)’의 옛 글자는 ‘닭, 서쪽, 익을’을 뜻하는 ‘유(酉)’다. 유자는 밑이 뾰족한 항아리 모양의 상형문자에서 변천된 것으로, 술의 침전물을 모으기 위해 끝이 뾰족한 항아리에서 발효시켰던 것에서 유래했다. 그 후 유자가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삼수변’이 붙게 된 것인데, 옛 글자에는 삼수변이 오른쪽에 붙어 있다. 보통 삼수변의 글자는 자전에서 찾을 때 수지부(水之部)를 보게 되지만, 주(酒)자는 유지부(酉之部)에 들어 있다. 酉(유)는 ‘지지 유’, ‘익을 유’로 읽히는데, 원래 술항아리를 상형한 것으로 술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술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자가 들어 있는 글자들 중에는 애초에 술과 관련된 글자가 많다. 술을 뜻하는 유(酉)가 변으로 들어간 모든 한자는 발효에 관한 광범위한 식품명이다. 취(醉), 작(酌), 례(醴), 순(醇), 작(醋), 장(醬) 등이 그 예다.
우리나라의 술 문화는 역사가 매우 깊다. 옛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인 마한(馬韓) 때부터 한 해의 풍성한 수확과 복을 기원하고자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 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로 미뤄 우리는 농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술을 빚어 마셨고 모든 행사에 술이 애용됐음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의 건국 전설에도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능신 연못가에서 하백의 세 딸을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마련해놓고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 세 처녀 중 큰딸인 유화(柳花)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한, 〈위지(魏志)〉 ‘고구려전’에 ‘선장양(善藏釀)’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고구려에서 술을 비롯한 발효제품이 많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당나라 풍류객들 사이에는 신라주가 알려졌다고 하는데, 그 발효의 바탕은 누룩이었다.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술은 발효원인 주국(酒麴)과 맥아(麥芽)로 빚어지는 주(酒)와 맥아로만 빚어지는 례(醴·감주)의 두 가지였다. 이 가운데 내외에 널리 알려진 대표 술은 ‘고려주’와 ‘신라주’다. 이 술들은 중국 송나라에 알려져 문인들의 찬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나라 이름을 앞세운 술이 있었던 데 비해서, 고려시대에는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등 술의 재료와 특성을 나타내는 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술의 이름은 조선시대 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증류주가 유입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한국의 술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양조법이 도입됐고, 전래의 주류양조법이 발전돼 누룩의 종류나 주류제품이 다양해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를 두어 빚었는데, 청주와 법주 두 종류로 구분해 질항아리에 넣고 명주로 봉한 후 저장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현재까지 유명주로 꼽히는 술이 정착한 때다. 이 시기에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여 제조원료도 멥쌀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기술도 단(單)담금에서 중양법(重釀法)으로 바뀌었다. 이때 명주로 꼽힌 것이 삼해주(三亥酒), 이화주(梨花酒), 부의주(浮蟻酒), 하향주(河香酒), 춘주(春酒), 국화주 등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지방주가 전성기를 맞았다. 지방마다 비전(秘傳)되는 술들이 맛과 멋을 내면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에는 서울의 약산춘(藥山春), 여산의 호산춘(壺山春), 충청의 노산춘(魯山春), 평안의 벽향주(碧香酒), 김천의 청명주(淸明酒) 등이 명주로 손꼽혔다.
조선시대에는 적지 않은 외래주도 공존했다. 천축주(天竺酒), 미인주(美人酒), 황주(黃酒), 섬라주(暹羅酒), 녹두주(綠豆酒), 동양주(東陽酒), 금화주(金華酒), 무술주(茂戌酒), 계명주(鷄鳴酒), 정향주(程香酒) 등이 이 시기에 유입된 외래주다.
전통주란 우리나라의 곡물을 주재료로 누룩을 발효재로 해서 물로 빚어 익힌 것을 말한다. 여기에 화학적 첨가물은 일절 첨가하지 않는다.
한국의 전통술은 탁주, 약주, 소주로 대표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제조방법으로 볼 때 탁주가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탁주에서 재(滓)를 제거해 약주가 됐으며, 이를 증류해 소주가 만들어졌다.
◇ 탁주=오늘날에도 널리 애음되고 있는 막걸리, 탁주는 약주와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도시의 서민층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랑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토속주다. 탁주는 예로부터 자가제조로 애용됐기 때문에 각 가정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어져 그 맛이 다양한 게 특징이며, 대중주로서의 위치도 오랫동안 유지돼 왔다. 탁주는 지방마다 대포, 모주, 왕대포, 젓내기술(논산), 탁배기(제주), 탁주배기(부산), 탁쭈(경북)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삼국시대 이래 양조기술의 발달로 약주가 등장했지만, 탁주와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다. 같은 원료를 사용해서 탁하게 빚을 수도 있고 맑게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로 대표적인 탁주는 이화주(梨花酒)였다. 이 이름은 탁주용 누룩을 배꽃이 필 무렵에 만든 데서 유래했지만, 후세에 와서는 어느 때나 누룩을 만들었으므로 그 이름이 사라졌다. 일반에 널리 보급된 탁주는 가장 소박하게 만들어진 술로서, 농주로 음용돼 왔다.
탁주와 약주는 곡류와 기타 전분이 함유된 물료나 전분당, 국 및 물을 원료로 한다. 여기에서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 제성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탁주와 약주로 구분된다.
◇ 약주=약주는 탁주의 숙성이 거의 끝날 때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 속에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고 깊게 통같이 만든 ‘용수’를 박아 맑은 액체만 떠낸 것이다.
약주란 원래 중국에서는 약으로 쓰이는 술이라는 뜻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약용주라는 뜻이 아니다. 한국에서 약주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시대 학자 서유거(徐有渠)가 좋은 술을 빚었는데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고, 그가 약현동(藥峴洞)에 살았다 해서 ‘약봉이 만든 술’, ‘약현에서 만든 술’이라는 의미에서 약주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약주에 속하는 술로는 백하주, 향은주, 하향주, 소국주, 부의주, 청명주, 감향주, 절주, 방문주, 석탄주, 법주 등이 있다. 이밖에 보다 섬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덧술한 약주에 호산춘, 약산춘 등이 있는데, ‘춘(春)’자를 붙인 것은 중국 당나라 때의 예를 본뜬 것이다. 그리고 비록 ‘춘’자는 붙지 않았어도 같은 종류의 술로 삼해주, 백일주, 사마주 등이 있다.
◇ 청주=청주는 백미로 만드는 양조주로서 탁주와 비교해 맑은 술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청주는 음료로서 사용되지만, 육류와 생선요리 등 각종 요리에 조미용으로도 사용된다.
청주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한국의 술이다. 일본 〈고사기(古史記)〉에는 백제의 인번(仁番)이 응신천황(應神天皇·270~312년) 때 일본에 건너와 새로운 방법으로 미주(美酒)를 빚었으므로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주는 청주의 전신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동국이상국집〉의 시(詩)에서는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데 겨우 4~5병을 얻을 뿐이다”라고 했고, 〈고려도경〉에서도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에서 다스리는데 청주와 법주의 두 가지가 있으며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해 둔다”라고 했다.
이로 미뤄 볼 때 고려시대에는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거나 걸러내어 맑은 술을 빚었고, 이미 덧술법을 사용해 알코올 농도가 높은 청주를 빚은 듯하다. 즉 발효가 끝난 술덧을 잘 걸러내어 부드럽게 마실 수 있게 한 술이 청주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청주가 만들어진 것은 1900년 이후다.
◇ 소주=소주는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일반 양조주의 결점을 없애기 위해서 고안된 술로, 발효원액을 증류해 얻는 술이다.
소주는 인도나 이집트 등에서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이나 2800년 전부터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국내 문헌에 의하면, 6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처음 생산됐다. 이때는 감로(甘露), 아라키(亞刺吉)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술을 만주에서는 이얼키(亞兒吉)라고 하고 아라비아에서는 아라크(Araq)라고 했다. 아라키라는 이름은 아라비아의 아라크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주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한 후 몽고인의 대본당이었던 개성과 전진기지가 있던 안동, 제주도 등지에서 많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고려와 함께 일본을 정벌할 때 안동을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안동소주가 알려지게 됐는데, 안동소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했다. 당시 원나라는 페르시아의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세력이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도 미쳤다. 원의 이러한 세력 확장에 따라 페르시아 증류법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한반도에 들어온 소주는 지역마다 명칭을 달리했다.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 했고, 평북지방에서는 ‘아랑주’라고 했다. 경북과 전남, 충북 일부에서는 ‘새주’, ‘세주’라고 했다. 진주에서는 ‘쇠주’, 하동과 목포, 서귀포 등지에서는 ‘아랑주’, 연천에서는 ‘아래지’, 순천과 해남에서는 ‘효주’라고 불렀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전래된 소주는 오랫동안 약용으로 음용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야 ‘술’로서 일반인들이 마시게 됐으며 ‘약소주’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는 평양에서 만든 ‘감홍로(甘紅露)’가 최초의 소주이고, ‘재소주’(두 번 증류하여 강도가 높은 소주)는 태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 가향주(加香酒)=술에 독특한 향을 주기 위해서 꽃이나 식물의 잎 등을 넣어 만든 술이다. 진달래꽃을 쓰는 두견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 화주(花酒)가 있는데, 빚는 방법으로는 일반 처방에다 가향재료를 넣어 함께 빚는 것과 이미 만들어진 곡주에 가향재료를 우러나게 해 빚는 가향 입주법이 있다.